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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죽은 이유

by 키스카 2018.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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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죽은 이유


끝내는 만고에 없던 사변에 이르고, 백발이 성성한 아비로 하여금 만고에 없던 짓을 저지르게 하였단 말인가?


-사도세자의 묘지문 중


사도세자가 죽음 237년 만에 영조가 쓴 묘지문이 공개되었씁니다. 1999년 12월 1일 사도세자가 비극적 죽음을 맞은지 237년만에 그의 묘지문이 세상에 공개되었습니다.



묘지문이란 죽은 자의 행적을 기록한 글로 보통은 무덤에 함께 매장되기도 합니다.



사도세자의 출생지는 창경궁 집복헌, 사망지는 한성 창경궁 문정전입니다. 1735년(영조 11년) 2월 13일에 태어나 1762년(영조 38년) 7월 12일에 27세 나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조선의 추존 왕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인 사도세자의 휘는 이선. 자는 윤관입니다. 영조의 차남이며 정조의 아버지이자 모친은 영빈 이씨입니다. 정실 아내는 혜경궁 홍씨이며 역사에서 영조와 갈등 끝에 뒤주에 갇혀 죽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사도세자 이선은 영조와 후궁 영빈 이씨 사이에 막내아들이자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당시 영조는 장남 효장세자를 7년 전에 잃고 다른 아들을 두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42세에 얻은 늦둥이 왕자의 탄생을 매우 기뻐했습니다.



1736년 이제 막 돌이 지난 원자를 왕세자로 책봉하고 세자가 읽을 책을 임금 영조가 직접 밤 새 가면서 필사했습니다.


이선은 총명한 모습을 보였고 태어난지 4달만에 기었고, 6달만에 영조의 부름에 대답했으며 7달만에 동서남북을 분간했고 2살에 한자를 배워 60여자를 써내기도 했습니다.




사도세자 아버지와의 갈등

사도세자와 아버지인 영조와 갈등은 어린시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3살때 영조는 세자를 매우 아끼며 칭찬하기 일쑤였지만 4살때부터는 아이를 구박하고 혼내는 모습이 점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영조는 세자를 더 엄격하게 키웠고 9살때 세자는 영조 만나기를 두려워하면서 10살 이후 영조의 태도는 더 혹독해지며 칭찬도 급격히 줄었습니다.


조선 역대 임금들은 격무에 시달려 환갑을 넘기기가 힘들었으며 평균 사망 나이는 47.1세였습니다. 영조가 세자를 보았을때 영조의 나이는 42세였습니다.


혜경궁 홍씨의 주장에 따르면 둘의 성격이 너무 달랐기에 충돌이 잦았으며 영조는 사람들을 전부 모은 앞에서 어린 사도세자를 세워 흉을 보며 망신주는 일이 잦았다고 합니다.



사도세자가 뒤주를 붙잡은 채로 아버지 영조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도 아비를 살려달라고 했으나 영조의 호통에 사도 세자는 하는 수 없이 뒤주 속으로 들어갔고 영조는 직접 뒤주의 뚜껑을 닫고는 자물쇠로 채웠습니다.


역사속에서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물 한모금조차 마시지 못하고 결국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사도세자가 정신병이 있었는데 증세가 심해지자 아버지 눈 밖에 나면서 죽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화성 융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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